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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소한 일상을 담다.
♣... 2011년 스페인, 포르투칼

스페인 - 비르셀로나 몬세라트

by 들국화/유채 2020. 9. 19.

성가족 성당을 출발한 우리는 개선문 옆을 통과하고 1888년에 만국박람회장으로 쓰였던 시우타데야 공원을 지나 몬카다 거리 한 모퉁이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 도착했다. 이 미술관은 1963년 개관하였는데 피카소는 1970년 이 미술관에 유화, 파스텔화, 소묘, 판화를 포함한 자신의 소년기와 청년기 때의 작품 900여 점을 기증했다. 피카소가 죽은 뒤에 그의 친구와 부인이 기증한 작품들도 있다. 그가 15세 때 그린 <첫 영성체>16세 때 그린 <과학자의 자비>는 어린 시절에 그가 가지고 있던 천재적인 잠재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며,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스페인의 대표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라스메니나스(시녀들)에서 영감을 얻어 패러디한 <라스메니나스>도 대단히 유명한 작품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화가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는 스페인 남부의 해안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나 14세에 바르셀로나로 이주해서 미술을 시작하며 고흐, 고갱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풍(作風)을 보면, 초기 사실주의에서 파리 시절의 인상주의’, 1903년 바르셀로나에 귀환하여 가난한 하층민을 푸른 색조로 슬프게 묘사한 청색시대(靑色時代)’,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 빨강, 노랑, 장미 빛 등의 색으로 밝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리던 장밋빛 시대와 서커스 테마를 주로 그린 피에로의 시대를 거쳐, 1912년부터는 입체의 모든 것을 평면상에 재구성한 종합적 입체파 시대로 변화하였다. 그의 작품은 총 5만 점에 달한다고 하며, 회화 뿐 아니라 조각, 도예, 석판화 등 모든 표현수단을 망라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여자그림이 많이 등장하는데 모두가 그와 관계가 있는 여인들이라고 한다. 피카소의 작품들은 한국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전시된바 있다. 나는 1975815일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 전시된 피카소 작품들을 관람하고 나오다가 조선일보사 앞에 이르러 영부인(令夫人) 육영수 여사 피격 사실을 알리는 붓글씨 벽보를 보고 놀란 바 있다.

인근 올림픽 항(Port Olimpic)에 있는 음식점 La Fonda에 들어가서 스페인의 대표음식 빠에야 마리넬라(Paella Marinela)를 주문했다. 빠에야란 말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담는 큰 쟁반이라는 뜻이다. 오징어, 조개 같은 해산물을 듬뿍 넣고 노랗게 물들인 쌀과 함께 쟁반에 담아 조리한 해물 비빔밥인데 오징어에 튀김옷을 입혀 올리브유로 튀겨낸 오징어와 함께 먹으니 짭짜름하기는 해도 일미(一味)였다. 이곳 사람들은 주말이 금요일부터 시작되므로 집에 남은 음식을 땡처리하려고 목요일에는 주로 빠에야를 먹었단다.

우리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에 있는 1235m 높이의 회백색 바위산 몬세라트(Montserrat)로 갔다. 산 아래 접근하여 목적지에 다 왔나 싶었는데 산길을 구불구불 오르면서 산 뒤편으로 돌아가더니 산중턱 벼랑을 깎아내려 만든 도로를 따라가며 12km를 더 올라간다. ‘몬세라트톱으로 자른 산이라는 뜻으로서, 카탈루냐 출신의 시인 Jacint Verdaguer는 이 산을 "With a saw of gold, the angels hewed twisting hills to make a palace for you" (당신을 위한 궁전을 만들려고 천사들이 뒤틀린 언덕을 금톱으로 잘랐다)라는 말로 이 산의 경이로움을 표현한 바 있다. 스페인의 천재건축가 가우디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이 산의 신비로운 자연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예술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수도원은 산 중턱의 725m 지점 평평한 선반 모양의 턱진 장소에 지어져 있었다. 많은 순례자들의 방문지로서 예로부터 카탈루냐 지방 사람들의 신앙의 성지가 된 이 수도원은 이미 11세기에 세워졌으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19~20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이곳에는 기록상 이미 13세기말부터 있어 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에스콜라니아(Escolania) 소년합창단이 있다. 현재는 5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사시간에는 그들의 성가(聖歌)가 계곡 곳곳에 은은히 울려 퍼져 듣는 사람 누구나에게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이 합창단은 빈 소년합창단’, ‘파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과 더불어 세계3대 소년합창단의 하나이다. 수도원 입구 쪽에 있는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수비라치 작품 <천국의 계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주변경치를 감상하며 성당으로 올라갔다.

 

 

 

 

 

성당 복도로 들어가 성 베드로 소예배실을 비롯하여 여러 소예배실을 지나쳤다. 갑자기 좁아진 통로 오른 쪽 벽에 검은 얼굴의 성모 마리아가 왕좌에 앉아 어린 예수를 무릎위에 앉혀놓고 있는 모자조각상이 나타난다. 니스 칠을 한 나무로 만든 상이다. 오른손에는 원주(圓珠)를 들고 있고 왼손으로는 아이 예수를 소개한다. 사람들 대부분이 여기 멈춰 경배드린 후 성모자상 부조(浮彫)를 만지며 소원을 빌고 지나간다. 원래 라 모레네타(La Moreneta)라고 불리는 이 검은 마리아상은 이곳 수도원에서 한참 떨어진 산속 산타코바 동굴 안에서 12세기경에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동안 촛불에 그으러 검은 마리아 상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원래 흑단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검다는 설()도 있다. 복도를 돌아 나와 웅장한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정면 정중앙에 조금 전 복도에서 만져 보았던 바로 그 검은 마리아 모자상이 보인다.

 

 

 

 

 

 

 

 

 

 

 

 

 

 

 

다시 성당 밖으로 나왔다. 길 아래로 제주도 돌하르방을 닮은 바위가 좌측 산허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 마당 뒤쪽 벽에 국내 TV에서 보았던 성 조지(St. George)상 이 보인다. 어느 곳에서 보아도 조각물과는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신기한 작품으로 이것 역시 요셉 수비라치가 제작한 것이다.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리스본 식당에서 주증애 여사가 단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오렌지들을 꺼내 기분좋게 먹어치운 다음, 각자 취향대로 흩어져 주변을 구경하였다. 성당과 부속건물 외에도 박물관, 레스토랑, 스낵 바, 호텔과 아파트 건물, 서점과 기념품가게, 우체국과 환전소, 넓은 주차장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운송수단으로 케이블카는 물론이거니와 몬세라트 역에서 수도원을 오가는 푸니쿨라(Funicular)라고 하는 암벽열차 선로도 놓여 있다. 산책로를 따라 도보로 하산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케이블카에 올랐다. 초속 5m 속도로 1,600m를 내려오는 짧은 시간이나마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공중에서 보고 느꼈던 그 장엄하고 신비로운 경치를 나로서는 필설(筆舌)로 표현할 재간이 없다. 우리들은 또다시 속세(俗世)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바르셀로나 시내로 다시 들어와 지하철 3호 노선이 놓인 그라시아 거리로 들어서니 중심가라서 루이뷔통, 구치, 샤넬 등의 명품점이 즐비하고 차량소통이 원활치 못하다. 호안 카를로스 1세 광장을 지나니 왼쪽 도로변에 카사 밀라(Casa Mila) 고품격 맨션이 나타난다. 하얀 석회암으로 지은 7층의 아파트형 건물이다. 율동하는 하얀 벽면은 물보라가 이는 바다를 연상케 하고, 베란다의 손잡이는 파도 속에 떠있는 검은 해초를 연상시킨다. 건물을 받쳐주는 특이한 모양의 돌기둥, 물결치듯 이어지는 벽과 동굴처럼 생긴 출입구, 옥상의 돌출한 산봉우리 모양의 굴뚝 등에서 직선을 철저히 배제하고 곡선만을 적용한 가우디의 독창적 작품이다.

얼마 못가 오른쪽 도로 코너에 또 하나의 가우디 걸작인 카사 바트요(Casa Batllo)저택이 서 있다. 외관은 희한하고 괴상망측하다. 이 건물은 바다를 주제로 하여 지어진 작품으로 파도를 연상시키는 구불구불한 공간미를 강조하고 있으며, 생명이 살아 숨쉬는 유기체 같아서 인체의 집이라고도 한다. 외벽 정면은 다양한 색채의 유리조각과 원형타일로 모자이크하여 햇빛을 받아 가지각색으로 찬란하게 빛난다. 곡선을 많이 사용한 내부가 특히나 무척 아름다워 1969년에 스페인의 역사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카사 밀라와 카사 바트요에 관하여는 빡빡한 일정 때문에 가이드로부터 구두설명만을 듣고 내부관람은 포기한 채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카탈루냐 광장을 지나 람블라스 거리 끝나는 지점에 이르니 해양박물관이 보이고 파우(Pau) 광장에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서있는 콜럼버스의 탑이 솟아있다. 인근 해변으로 나가니 그 넒은 백사장이 선탠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간혹 앞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대담한 여성들도 있다. 보기 민망하여 과다노출자 비밀감시요원 성준이와 윤수가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 곳을 떠났다. 우리 가이드가 안내하는 Marina Moncho 레스토랑으로 갔다. 여행을 떠나온 후 식사 때마다 회원들이 자연스레 돌아가며 와인 스폰서가 되어 반주로 한·두 잔씩 마셨는데, 오늘 저녁식사에는 스테이크에 맥주를 양껏 마시고 공동경비로 지출하였다. 기분들이 좋아져서 2시간 쯤 시내에서 시간을 더 보내다가 들어갈까 하는 생각들도 있었지만 여행 마무리 모임을 숙소에서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밤이 될 것 같아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들은 과일, 과자, 소주, 커피 등 남아있는 술과 안주를 싸들고 여행단장 방에 모였다. 각자 돌아가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픈 말들을 하였다. 회원들 중 조용한 성격의 김인순 여사는 친족의 겹친 우환으로, 명랑한 윤윤희 여사는 사업상 돌발적인 변수로 출발 전 부터 깊이 고민을 했었으나, 모두가 하나같이 오기를 잘했고, 매우 행복하며, 이 모임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였다. 윤수가 자청하여 모친상에 힘과 위로를 준 회원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고, 회원들의 건강과 이 모임의 지속적인 발전을 축원하는 기도를 했다. 회원들은 날로 변해가는 윤수를 괄목상대(刮目相對)하며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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