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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소한 일상을 담다.
♣... 2013년 터키여행

2013년 터키여행

by 들국화/유채 2020. 9. 3.

2013년 10월 15일

2014년 10월 14일 13시 45분  (대한항공) 인천국제공항 출발 19시 40분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도착

운항소요시간은 약12시간이며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습니다.

(3월 마지막주-10월까지 섬머타임시에는 6시간 늦습니다.)

호텔로 이동하여 하루밤을 투숙하게 됩니다.


얼마전 영국 여행기에 이어 터키 여행기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배재 8360 해외 여행은 2009년 뉴질랜드, 2011년 스페인, 2013년 터키 입니다.

부부회원 20명중 이번 여행은 14명만 참가를 했었네요. 이번 여행기도 임정호 작가님의 터키 여행기를 참고로 저는 사진만 인증하는 형식으로 올리려 합니다.

우선 여행기를 먼저 올리고 사진은 다음 새글로 시작을 하겠습니다.



배재8360 터키 여행기

2009년 뉴질랜드, 2011년 스페인/포르투갈에 이어 배재8360의 제3차 여행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우리나라와 피로 맺어지고 2002년 월드컵으로 더욱 가까워진 터키이다. 안호석회장 부부는 장남 결혼식날짜가 예기치 않게 귀국 3일후로 확정됨에 따라 금일봉을 전달해 왔고, 다른 회원 몇 사람도 개인사정으로 불참하게 되어 이번 여행에 참가한 기존회원은 10명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노근수/강영희 부부 및 이완용/허옥순 부부가 신규 회원이 되어 동참하고 우리와 비슷한 연배의 여성 두 분이 합류함으로써 예정대로 2013년 10월 14일 관광여행사 담당자 유정수님의 인솔하에 장도(壯途)에 오르게 되었다.

인천공항발 대한항공 보잉 777-200 여객기는 오후 2시15분 활주로를 박차고 청명한 가을하늘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기수(機首)는 정서 방향, 고도 38000피트, 시속 약 500마일을 유지하며 황해를 건너 고비사막을 지나 톈산산맥을 넘고, 카스피해와 흑해 상공을 날아 마침내 동서문화의 교차로인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에 착륙했다. 기내(機內) 앞좌석 등받이에 부착된 모니터는 도착지시각 14일 오후 7시 25분, 출발지시각 15일 오전 1시 25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들은 5185마일의 거리를 11시간 10분간 비행하면서 한시적(限時的)으로 6시간 젊어진 셈이다. 짐을 찾아 도착로비로 나오니 현지인솔자 이기섭씨(41세)가 반갑게 맞이한다.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 이기섭씨의 본인 소개와 개략적인 여행일정 및 터키의 이모저모에 대하여 듣는 동안 첫날밤을 묵을 Silverside Hotel에 도착하였다. 터키인 운전기사 라민스(46세)씨가 버스안의 냉장고에 넣어둔 생수를 1인당 1병꼴로 사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해진 우리는 유정수님으로 부터 방배정표를 받아들자 곧바로 입실하여 여장(旅裝)을 풀었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걸쳐있는 나라로서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그리고 다르다넬스 해협이 두 대륙사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전체 국토 면적은 783,562㎢이나 유럽 쪽 터키는 단 3%에 불과하고 나머지 97%가 아시아 쪽 터키이다. 인구는 약 7800만 명으로 투르크인이 80%를 차지하며, 약 1500만 명의 쿠르드인이 살고 있다. 언어는 아랍어 쿠르드어 터키어가 있으나 공식 언어는 터키어이며 우리말과 같은 우랄-알타이어족(語族)의 알타이어군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말과 문법이나 어순이 비슷하다. 기후는 대체로 에게·지중해 지역은 지중해성기후이고 내륙 지역은 대륙성기후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4계절을 가지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이며, 공화제 국가이다. 화폐는 터키리라(TL)이며 환율은 미화1불당 약 2터키리라, 1유로당 2.7터키리라 안팎이다.

10월 15일(화) 여행 2일차 - 이스탄불

오전 6시 30분 모닝콜, 7시 30분 아침식사, 8시 30분 버스출발이다. 이것을 한목에 묶어서 6반, 7반, 8반이라고 약칭한다. 전날 장거리 비행으로 충분한 휴식시간이 주어졌으나 시차영향으로 대다수의 팀원들이 새벽 2시 내지는 4시부터 깨어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했다. 터키에서의 처음 먹는 뷔페음식이지만 일행들 모두 즐기며 식사한다. 누군가 물통의 물을 페트병에 담자 이를 지켜 본 종업원이 1달러를 요구한다. 메르세데스 벤츠 대형전속버스에 올라 각자 원하는 곳에 좌석 2개씩을 차지했다. 부부들은 같은 열에 중앙통로 좌·우로 나뉘어 앉았다. 현지인솔자가 아침인사를 하자 우리들이 복창을 한다. “귀나이든”. “귀나이든”
새로운 얼굴이 보인다. <일케르>라는 이름의 29세 남성이다. 스페인/포르투갈에서도 그러했듯이 외국인 단체관광객이 특정 유적지에 입장하려면 필히 자격을 갖춘 현지가이드를 대동하게 되어있다. 선해 보이고 갸름한 얼굴에 짧은 머리와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적당히 기른 그는 성화(聖畵)에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의 외모와 흡사하다.

오늘은 쿠르반 바이람(Kurban-희생/Bayram-명절) 연휴 시작 첫날이다. 오늘 오전에 방문예정인 톱카프 궁전이 문을 열지 않아 여행 마지막 날(10월 21일) 일정과 일부 교체가 불가피해졌다. 희생절은 알라(Allah)신이 아브라함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하여 100세에 낳은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자 아브라함은 기꺼이 응하려 했고, 결국은 아들 대신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바친 것에서 유래한다. 희생절은 이슬람의 금식월(禁食月)인 라마단이 끝난 날로부터 70일째부터 4일간 계속된다. 양의 생피를 신에게 바치는 이 기간 중에 터키 전역에서 수백만 마리의 양이 도축된다고 한다.

터키 관광은 보스포러스(Bosphorus)해협 유람선 탑승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북쪽의 흑해에서 시작하는 바닷물이 이스탄불을 관통하는 이 해협을 지나 마르마라 해로 흐른다. 우리에게는 아시아와 유럽이 나뉘는 해협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골든혼(Golden Horn)이라 불리는 강어귀의 선착장에서 탄 배는 갈라타 다리 밑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유럽지구 해안가를 거슬러 올라간다. 길이 30km, 폭 550m-3,000m, 평균 수심이 80m에 달하여 대형선박들도 출입이 가능한 장엄한 해협이다. 주위에 크고 작은 여객선 뱃고동 소리가 운치를 더해주고 갈매기는 먹이를 찾아 바삐 날아다닌다. 해안을 따라 600m에 이르는 유럽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돌바마흐체 궁전이 마치 바다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곧이어 츠라한 궁전호텔, 오르타과이 모스크를 지난다. 모스크의 첨탑 위로 1973년 터키공화국 수립 5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거대한 보스포러스 다리가 솟아있다. 그 아래를 통과한 배는 얼마 후 U-Turn을 하여 이번에는 아시아지구 해안에 가깝게 항해한다. 오랜 세월 외항선을 탔던 마린보이(marine boy) 노근수는 기분이 한껏 고조된 모습이다.

선창에서 콧수염을 기른 초로(初老)의 터키 남성이 우리가 한국인(꼬레)인 것을 금세 알아보고 다가와 “카르데쉬” 라고 말한다. 이기섭씨가 옆에서 ‘형제’란 의미라고 일러준다. 옛날 그들의 조상들은 돌궐족이었다. 돌궐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때 우리와는 같은 나라를 이루고 있던 부족연맹이다. 고구려, 발해가 망하고 돌궐이 독자적으로 아랍으로 쳐들어가 세운 나라가 투르크였다. 돌궐을 백인들이 ‘투르크’ 라고발음하였고, 투르크의 영어식 발음이 ‘터키’이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은 우리처럼 눈이 작은 아시아인의 얼굴이었고 지금도 몽고반점이 있다고 한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특히 유럽 쪽 해안이 아름답다. 그러나 많은 터키인들은 아시아 쪽 해안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한단다.

 

위스퀴다르(Uskudar) 항구 옆을 통과한다는 이기섭씨의 말에 어린 시절 LP전축으로 자주 들었던 번안곡 우스크다라가 생각난다. 우스크다라는 우리나라의 황성옛터처럼 터키의 대표적 민요이다.

“우스크다라 머나먼길 찾아왔더니 세상에서 처음보는 이상한 나라
거리를 걸어갈 때 깜짝 놀랐네. 이렇다면 총각들이 불쌍하겠지.“

물 위에 <크즈 쿨레시 : Kiz Kulesi>라는 작은 섬과 그 안에 지어진 탑이 보인다. 크즈는 처녀를, 쿨레시는 탑을 의미한다. 옛날 이 지방의 태수에게 사랑하는 딸이 있었는데 유명한 점쟁이로부터 16세가 되기 전에 독사에 물려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를 피하고자 이 섬 위의 탑에 그의 딸을 살게 하여 어느덧 무사히 16세가 되었단다. 태수가 생일축하 과일바구니를 보냈는데 하필이면 그 안에 독사가 숨어있어 물려 죽었다는 슬픈 전설의 탑이다. 오랜 옛날에 통행세 징수를 하였고 방어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는데 후에 등대를 설치하고 선박안내 역할을 한 특이한 명소이다.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영화 <007 언리미티드>에 이 탑이 등장하기도 했다. 진행방향 맞은편 유럽지구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톱카프(Topkapi) 궁전이 보인다.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 담겨있는 곳이다. 배는 ‘갈라타’ 다리 밑을 통과하여 출발지로 되돌아왔다.

버스로 이동하여 마치 한국의 재래시장 형태의 식당가로 들어섰다. 식당들이 중앙 통로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다. 식당의 앞마당에는 식당마다 서로 다른 화려한 색상의 4인용 식탁이 좌우 각각 2열종대로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안쪽으로 한참을 걸어 파타라(Patara) 레스토랑에 들어간다. ‘파타라’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고대 리키아의 주요 항구였다. 오늘날 ‘산타클로스’로 알려진 성 니콜라스가 4세기 경 태어난 곳이다. 터키의 전통음식으로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 양고기 케밥(Kebap)을 주문하였다. 식사는 빵을 적셔먹을 수 있는 터키식 스프 ‘초르바’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에크멕’이라고 불리는 빵이 나오는데 프랑스의 바게트와 맛이 비슷하나 바게트가 길쭉한 형태인데 비해 에크멕은 타원형의 럭비공 모양이다. 또한 공기로 부풀린 ‘발론 피데’라 하여 우리나라 공갈빵과 비슷하게 생긴 빵이 있는데 그 맛이 담백한 게 일품이다. 주 요리인 케밥의 종류에는 양고기나 소고기를 잘게 썰어 양배추, 토마토 등 야채와 함께 빵에 싸먹는 ‘되네르(Doener)케밥’, 양고기나 소고기를 큰 꼬치에 끼워 바비큐 식으로 즉석에서 구워 야채샐러드와 함께 먹는 ‘쉬쉬(Shish)케밥’ 등이 있다. 케밥에 사용하는 고기류에는 양고기, 소고기외에도 고등어가 인기이다. 디저트로는 요구르트가 대부분이다.

식후 현지인솔자 이기섭씨 뒤를 따라 ‘히포드럼’ 광장으로 이동하였다. 태극기 문양의 소형양산을 쓰고 다니기 때문에 군중 속에 멀리 떨어져있어도 금방 식별이 가능하다. 히포드럼은 3세기 초에 건설된 U-자형 경기장으로서 전차경기와 격투장, 정치인들의 선동장소 등의 용도로 활용되었는데 당시 황제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가져온 획득물을 이곳에 전시했다고 한다. 영화 <벤허>에 나오는 전차경주 장면은 이곳에서 촬영한 것이다. 히포드럼에는 이집트 오벨리스크(Obelisk), 뱀기둥(Spiral Column), 콘스탄틴 기둥이 남아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BC15세기에 이집트 룩소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 세워져 있다가 AD390년 작은 크기로 나누어져 수송되었는데 상단부분이 이곳으로 옮겨져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만든 대리석 제단위에 놓였다. 한 가운데에는 세 마리의 뱀이 휘감긴 모습이 인상적인 청동제 뱀기둥이 있다.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그리스 동맹군이 승전기념으로 BC478년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앞에 건립했던 것을 AD330년 무렵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가져와 이곳에 세웠다. 현재 뱀기둥 머리 하나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하나는 런던 영국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가장 안쪽의 돌을 쌓아올린 오벨리스크는 콘스탄티누스 7세에 의해 세워졌으며 32m의 높이에 외부는 청동으로 입혀져 있다. 이 역시 4차 십자군 전쟁당시 라틴 군인들이 떼어내 동전을 주조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아야소피아(Aya Sofya)박물관’으로 갔다. 비잔틴 건축의 걸작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 성당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기위해 비잔틴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건립했다. 537년 완공 이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1000년 동안 동로마 교회의 대주교 교회로서의 자리를 지켜왔다. 이후 오스만 제국시절 정복자 메흐메트 2세는 기존건물에 이슬람의 성지(聖地) 메카로 향해있는 아치형의 미흐라브(mihrab), 미나레트(minaret:첨탑), 마드라사(madrasah:이슬람학교)를 추가로 건설하며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했고, 1935년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이 사원을 박물관으로 변경하였다.

보안검사대를 통과하여 아뜨리움(안뜰)을 지나 건물의 외랑(外廊)을 거쳐 다시 내랑으로 들어간다. 본당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문이면서 황제 전용문이었던 <임페리얼 문> 위쪽에는 그리스도 모자이크화가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면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한없이 작아지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내부본당의 면적은 100×70m이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거대한 돔과 유리창, 숱한 샹들리에와 이슬람문자가 새겨진 원판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돔의 크기는 직경 30.31m 높이 55m이나 건물벽 속에 감춰진 40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어 마치 돔이 아무런 지지대 없이 공중에 떠있는 듯한 효과를 낸다. 원판에는 무하마드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을 써놓은 것이란다. 본당의 일부공간은 공사 중이다.

내랑으로 다시 나와 경사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 경사로의 반질반질한 바닥 돌이 장구한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 2층 갤러리 안에 진로를 막아선 많은 관람객들이 좌우, 상하 사방으로 카메라를 돌리며 셔터를 눌러댄다. 내 카메라가 갑자기 진동하며 이상 징후를 보인다. 남쪽 갤러리에는 경이로운 작품 ‘디시스 모자이크화(Deesis Mosaic: 최후의 심판)’가 있다. 14세기 초에 제작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중앙에 있고 성모 마리아는 왼쪽, 세례요한이 오른쪽에 묘사되어 있다. 성당 안에는 손상된 모자이크화가 많다. 이는 십자군 전쟁 당시 라틴 기사들의 물욕(物慾)에서 훼손되었고 오스만 군대는 그 위에 회칠을 해서 그 형상을 가렸을 뿐이란다. 이슬람교는 우상 숭배를 절대 금하는 종교라서 이슬람 건물에는 성화(聖畵)가 존재하지 않고 아랍문자를 변형한 문양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오스만인 들의 종교적 관용 덕분에 아야소피아의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를 우리 같은 후세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덧 오후 3시이다. 이스탄불에서의 나머지 관광은 여행 마지막 날로 미룬 채, 우리는 마르마라 해를 오른 쪽에 두고 동쪽 방향으로 달렸다. 이기섭씨는 터키 및 헝가리의 조상과 연관된 흉노족, 돌궐족, 훈족, 예맥 등 동북아시아의 고대사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쏟아낸다. 간간이 규봉이의 기지(機智) 넘치고 순발력 있는 재담이 차내를 온통 웃음바다로 만든다. 휴게소에서 잠시 상점에 들어간 규봉이는 터키어로 인쇄된 품질표시라벨에 F15라고 적힌 작은 백화수복 정종병 크기의 제품을 사들고 나왔다. 그는 알코올음료로 짐작하고 구입했는데 실제로는 15가지 과일이 혼합된 주스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대가 높아지고 포플러, 은행나무가 군락을 이룬 울창한 나무숲이 가을빛으로 물들어간다. 소주잔이 돌고, 육포, 견과류, 홍삼젤리, 마른 미역, 비스켙이 앞뒤로 전달된다. 운전석 디지털 계시기가 오후 6시를 나타낸다. 차내는 조용해지고 도로변 이정표는 앙카라까지 126km 남았음을 알려준다. 구릉지대로 바뀌면서 밀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해는 버스 뒤편 산등성이 위에 낮게 걸쳐있고 발갛게 노을이 진다. 해발 1680m 고산지대를 넘어선 버스는 어둠을 뚫고 마지막 피치를 올리며 내리막길을 달린다. 마이크를 잡은 현지인솔자의 앙카라 시내진입 안내에 잠에서 깨어난 친구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된다. 6시간에 걸친 장거리 차량이동이 끝나고 한국시각 새벽 3시가 되어 2일차 숙소 ‘Bilkent Otel’에 도착했다.

호텔 지하의 바(Bar)를 겸한 식당에 들어가니 집기비품 시설물 일체가 온통 초콜릿 색조를 띤 고급스런 분위기이다. 일렬로 배치된 식탁 앞에 한국인 18명이 앉아 종업원들의 서빙을 받으며 우아하고 품격 높은 유럽식 정찬을 시작한다. 서울 송파에서 오신 김*주, 박*덕 여사들도 차츰 우리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규봉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이 결혼 36주년 되는 날이라며 짧게 기념사를 한다.

“ 일제 강점기 36년의 세월과 똑같은 36년의 기간을 압박과 설움 속에 결혼생활을 해오면서, 우리 부부는 두 아들을 낳았고 1남 1녀의 귀여운 손주를 얻었습니다. 이제부터는 해방된 부부로서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행복한 노후생활을 가지렵니다.”

노후에 찾아온 행복을 규봉이 특유의 익살스러움으로 표현한다. 남자들은 소주로 여자들은 규봉이의 F15 과일주스로 유리잔을 채우고 축배를 든다.

10월 16일(수) 여행 3일차 - 앙카라/카파도키아

오전 5시가 안되어 건물 밖으로 나서니 새벽공기가 차갑다. 희미한 불빛 속에 부지런한 동욱이, 규봉이, 병호 내외가 보인다. 조금 있으니 완용이 부부가 나오며 자기네가 1등으로 나왔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윤수와 근수 부부도 뒤따라 나왔다. 모두가 하나같이 객실이 마음에 들었다며 흐뭇해한다. 병호는 “똑같은 5성호텔이지만 이 호텔의 숙박비가 200불이라면 첫날 이스탄불에서의 호텔은 20불짜리도 안 된다” 며 불만을 토로한다. 모두가 공감하였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6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7시에 호텔을 출발했다. 한국공원에 가기 전에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의 묘가 있는 <아느트 카비르> 기념관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일정에서는 아쉽게도 외부관람에 그친다. 신시가 서쪽 언덕에 조성한 휴식공간으로 터키인들이 가장 신성한 곳이란다. 이곳은 1년 365일 아타튀르크를 그리워하고 또한 기리는 터키인들의 행렬로 끊이질 않으며 터키 국민들의 조국애를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일제 치하 36년간 온몸을 바쳐 투쟁했고 해방 후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웠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다보탑과 비슷한 형태로 세운 한국전참전토이기기념탑이 공원 중앙에 서 있다. 터키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1만 5천 명을 파병하였는데 대부분 지원자였단다. 그중 죽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이 3천명에 달한다. 터키군의 혁혁한 전공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건립된 이 기념탑은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3년 10월29일 터키공화국건립 제50주년기념일을 기하여 한국정부가 터키국민에게 헌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탑 정면에 모여 기념촬영부터 하였다. 동욱이는 우리 부부를 찍는 사진마다 뒤쪽에 살짝궁 끼어들어 폭소를 자아낸다. 탑의 주변은 하얀 석벽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석벽에는 한국전쟁 전사자 773명들의 계급, 이름, 출생년도, 사망일 등이 검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다. 탑 1층으로 올라서니 부산의 유엔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터키 용사 묘로부터 옮겨온 흙이 담긴 정사각형의 큼직한 대리석 관이 놓여있고 관위의 앞쪽 좌우 모퉁이에는 대리석 화병이 놓여 있다. 꽃다발이라도 준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정문 쪽으로 되돌아 나오는데 청소를 하던 관리인이 빗자루를 들고 비껴서 있다. 한국참전 어느 용사의 후손으로 추측된다. “멜하바(Merhaba: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니 그 남성도 “멜하바”하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그 사람의 수고에 대한 자그마한 성의표시로 김정수님이 10달러를 건네주었다.

다음 목적지는 앙카라 남쪽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앙에 펼쳐진 기암지대 ‘카파도키아’이다. 약 300km를 이동해야한다. 앙카라시를 벗어나면서 밀밭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이곳의 밀은 난장이처럼 키가 작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보면 키 큰 잔디밭처럼 보인다. 강수량이 적은 환경에 적응하고자 몸집을 줄인 것이리라. 오전 8시 20분 현재 섭씨 7도를 나타내고 있으니 우리나라 북부지방과 비슷한 기온이다. 투즈골루(Tuz Gölü)의 소금호수(Salt Lake)에 도착했다. 기념품과 간단한 음식을 파는 상가를 지나 소금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수억 년 전 터키 대륙이 지각변동으로 융기하면서 바다였던 곳이 떠올라 해발 1700m 고지에 호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면적은 서울시의 2.5배인 무려 1500평방킬로미터나 되고 호수 둘레만도 65km나 된다. 멀리 내다보면 흰눈이 내려앉아 쌓여있는 것 같다. 우기에 접어들고 햇볕이 약해지는 가을, 겨울에는 호수처럼 소금물을 담고 있지만, 건기가 되어 일조량이 많은 봄, 여름에는 유입되는 물보다 증발량이 많아져 순백색의 소금사막으로 변하는 것이다. 바닷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증발되어 염도가 무려 33%까지 높아졌다고 한다. 터키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60%가 이곳에서 얻어진단다. 양떼들과 양몰이 개가 자주 보이고 소와 말의 방목장도 이따금 보인다.

정오가 되면서 카파도키아에 들어왔다.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갖가지 버섯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지역이다. 카파도키아란 ‘야생마의 땅’이란 의미를 가진다. 현지안내인 <일케르>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3천만 년 전 타우로스 산맥의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山(3917m)과 핫산山(3268m)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이곳의 지형은 오랜 세월에 걸쳐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 부드럽고 쉽게 깎이는 응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러한 바위를 깎고 동굴을 만들어 주거공간이나 저장공간을 마련하여 생활을 하였는데 많을 때는 200만 명까지도 살았다고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청보석상이 들어 있는 건물의 지하음식점에 들어가 카파도키아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다는 ‘항아리 케밥’을 주문하였다. 입구가 작은 항아리 안에 구운 고기와, 버섯, 감자, 가지, 호박 등의 야채를 넣고 입구를 밀봉한 다음, 섭씨 80도로 3시간가량 삶은 후 항아리를 망치로 돌아가며 살살 두드려 깨뜨리고 내용물을 먹는다. 규봉이는 엊저녁 결혼36주년기념식의 2부 행사로 현지와인 3병을 쏘았고 우리들은 재삼 이들 부부의 행복한 구혼(舊婚)생활을 기원하며 ‘위하여’를 외쳤다.

맨 먼저 들린 곳은 ‘뾰족한 성채’를 뜻하는 ‘우츠히사르’(비둘기 계곡)이다. 거대한 바위 성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여러 기암괴석이 모여 마치 왕관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위 표면에는 비둘기 집이라 불리는 구멍들이 수 없이 뚫려 있다. 주변으로 커다란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상가들도 즐비하다. 안장을 얹고 마스크를 씌운 낙타가 있어 그 앞에 부인을 세우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니 주인이 다가와 1달러를 요구한다. 이왕 돈 낼 거라면 정식으로 한 컷 더 찍겠다고 하고 낙타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안장줄을 잡은 모습을 찍었다. 성채바위 있는 곳을 향해 가급적 높은 지대로 올라간다. 카파도키아의 광활한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맑고 파란 하늘에 눈부신 태양으로부터 햇빛이 강렬하게 쏟아져 내리고 관광객들은 역광을 피해 풍경사진을 찍거나 또는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인물사진을 찍느라 분주히 움직인다.

 

마을 중심에서 1km쯤 떨어진 언덕에 있는 ‘괴뢰메(Göreme) 야외박물관’으로 갔다. 카파도키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로 암벽을 깎아 만든 동굴, 교회, 예배당, 수도원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입구에 있는 '성 바실(St.Basil)예배당' 토굴로 들어가니 바닥에는 쇠살로 덮인 구멍이 있다. 예배당 건축가와 재정가들을 위한 무덤이란다. 중앙실 왼쪽에 성 바실, 오른쪽에는 십자가가 있으며 이교도의 상징인 용을 처단하는 ‘성 조지’와 ‘성 테오도르’의 그림, 아기예수를 안은 마리아 그림도 있다. 자갈포장도로를 계곡을 따라 위쪽으로 계속 올라가 12세기 ‘엘말르 킬리세(사과 교회)’로 들어가니 붉은빛 황토칠 위에 성서장면이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다. 교회 이름은 근처에서 자란 사과나무에서 따왔을 것이라 한다. 언덕위에 자리 잡은 ‘이을라늘루 킬리세(뱀 교회)에는 용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모욕을 더하기 위해 교회 이름을 지을 때 고의적으로 용을 뱀으로 틀리게 표현했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인근 북쪽에 있는 ‘젤베 야외박물관’ 어귀에 있는 ‘파샤바’로 갔다. 파샤바는 ‘장군의 포도밭’이라는 뜻이지만, 페리바자 즉 요정의 굴뚝으로 유명하다. 페리바자는 카파도키아의 상징인 버섯바위를 가리키는데, 버섯의 갓에 해당하는 검정색 부분은 현무암이고 아래 흰색 부분은 부드러운 응회암으로 되어 있다. 이 페리파자들이 파샤바 계곡 곳곳에 널려 있다. 페리바자의 몸통에 뚫려 있는 구멍은 실제로 사람이 살았던 동굴집이다. 하얀 고깔모자를 쓴 파란 난쟁이 <스머프> 만화 영화에 나오는 깊은 숲속의 버섯집은 이곳의 페리파자를 모델로 그려졌다고 한다. 성 시몬 교회가 자리 잡은 페리바자로 관광객들이 열심히 기어오른다. 중도에 앞뒤로 뚫린 이름 없는 페리바자 동굴 속에서 저 아래 주차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어보건만 인물부분이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곳곳에 척박한 모래땅에서 야생포도나무도 눈에 띤다. 아름답고 진기한 바위마을을 이룬 동화나라를 떠나기 전에 회원 몇 명과 기념품 노점상에 들어갔다. 한동안의 밀고 당기는 흥정이 있고나서 관광지 치고는 저렴한 가격에 수공예 냄비받침 몇 개씩 사들고 나왔다.

오늘의 마지막 관광지인 ‘카이마클르(Kaymaklı)지하도시’에 입장마감시각(4시30분) 1분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였다.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는 히타이트 왕국 시대(기원전18세기-13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했고 6-7세기 경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군대가 이 지역을 침략했을 때, 비잔틴 기독교인들은 비밀통로를 통해 100여개의 지하도시로 숨어들어갔다. 카이마클르는 지하8층의 도시인데 현재 4층까지 공개하고 있다. 한 때는 약3000명의 사람들이 살았으며 한 번 지하도시에 내려오면 몇 달씩 살았다고 한다. 좁은 터널과 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수직으로 수십 미터 파내려간 정방형 통풍구는 공사자재나 쓰레기, 분뇨 등의 운반 통로 등 다목적으로 이용했다. 지하에서 발생하는 연기는 부드러운 응회암이 대부분을 흡수하고 남아 있는 연기는 통풍구를 통해 위로 흩어져서 적군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비좁고 낮은 통로를 허리 굽혀 이동해야했기에 마치 유격훈련을 받는 느낌이다. 마구간, 제단이 있는 교회, 공기 순환 구멍이 있는 벽, 맷돌이 놓인 곡물창고, 오븐이 있는 주방, 돌바퀴를 좌우로 굴려 통로를 여닫을 수 있게 한 개폐(開閉)장치 등도 구비되어 있다. 또한 이웃 지하도시로 연결되는 9km의 통로도 파놓았다고 하니 개미인간같은 그들의 지혜에 탄복할 일이다.

내일 새벽 카파도키아 열기구를 타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카파도키아는 건기(乾期)인 4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비행조건이 매우 좋아 거의 매일 아침 열기구를 운행한다고 한다. 굉장히 황홀한 경험을 선사하므로 타본 사람들은 터키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열기구를 꼽는다. 그러나 열기구는 바람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원하는 날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때론 날씨 때문에 안전을 위해 온종일 열기구를 띄우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숙소로 가기 위해 오전에 버스가 지나온 악사라이(Aksaray)까지 1시간 30분 거리를 되돌아갔다. 악사라이는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해가는 인구 15만 명의 도시이다. 도시 입구 도로변 가까이 있는 Grand Altuntas Hotel에서 내렸다. 조경석이나 정원수 상태로 보아 개업한 지 얼마 안돼 보이는 호텔이다. 내일 날씨가 좋다는 전제(前提)하에 새벽 4시 45분에 출발예정이라 한다. 뷔페식 저녁식사 후 내일 날씨가 우리를 도와주기를 바라며 배정된 객실로 흩어져 들어갔다.

2013년 10월 17일(목) 여행 4일차 - 콘야/안탈리아

새벽 4시 30분에 1층 로비로 내려와 잠시 건물 밖으로 나서니 하늘에 구름은 별로 끼지 않았는데 바람에 정원수 나뭇잎들이 파르르 떨고 있다. 팀원들 모두 짐을 가지고 내려와 호텔로비에 집결하였다. 열기구 회사와 통화한 현지인솔자는 현재 카파도키아의 기상상태가 안 좋으니 좀 더 지켜보고 5시 15분에 운행가능여부를 알려주기로 했다고 전한다. 우리는 현지 사정이 호전되어 다소 늦게라도 열기구를 탈 수 있기를 바라며 반시간을 더 기다린다. 마침내 열기구회사로부터 기류악화로 운행을 취소한다는 최후통첩이 왔다. 회원들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했고 쳐진 어깨로 무거워진 가방을 끌고 객실로 다시 올라갔다. 특히 두 번째 터키 방문에서도 열기구탑승 기회를 상실한 은순, 정순, 정수 씨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침식사를 끝낸 우리들은 지중해 서부해안에 있는 안탈리아(Antalya)를 향해 9시 30분 호텔을 떠났다. 8시간을 버스로 이동해야 한단다. 도로변에 규모가 엄청 큰 공장이 있어 자세히 보니 잎을 따낸 사탕무를 실어 놓은 트럭들이 공장 진입도로에 줄줄이 늘어서 있다. 설탕제조공장인 것이다. 가도 가도 양편에 밀밭과 사탕무밭 옥수수밭 벌판이 끝없이 이어지고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만 보인다. 400km에 이르는 곡창지대이다. 해발 1000m 고지에 위치한 130만 명 인구의 콘야가 가까워진다. 콘야를 로마인들은 ‘이코니움’이라 불렀고, 터키인들이 콘야라고 불렀다. 이코니움은 <성 베드로>가 몇 차례 다녀간 곳이다.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특히 지중해의 항구도시 안탈리아로 가는 경유지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대상(隊商: Caravan)의 숙소가 남아있는 곳이며 13세기 셀주크 시대에는 한 때 수도이기도 하였다.

휴게소에서 하차하니 건물 꼭대기와 주차장 대형 안내광고판 등 곳곳에 ‘세마(하늘)’라고 하는 춤을 추는 인형들이 보인다. 세마춤(sema dance)은 이슬람교 ‘메블라나’ 교단(敎團)의 의식으로 신과의 합일(合一)을 상징하는 춤이며 유네스코의 제3차 세계무형문화유산에도 포함되었다. 원통형의 모자를 쓰고 흰 옷을 입고는 신을 찬미하는 시와 율동이 어우러진 가운데 빙글빙글 돌며 추는 춤이다.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오른손바닥은 하늘을 향하여 하늘의 축복을 받고, 왼손바닥은 땅을 향하게 하여 축복을 땅으로 전달한다. 강당크기만한 널찍한 음식점(GUNTER)으로 들어가 뷔페음식을 먹었다. 쌀밥도 제공되므로 준비해온 김, 소고기볶음 고추장, 깻잎장아찌 등으로 한국형 터키식사를 하였다. 캔 사이다(Sprite) 하나를 집어다 마셨더니 종업원들이 4달러를 요구한다. 터키에서 화장실은 대부분 유료(有料)이고 사용료는 1인당 1터키리라이다. 남자는 Bay(바이), 여자는 Bayan(바얀)이라고 쓰인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가끔 이성(異性)화장실로 들어가려다 움찔하는 사람들도 있다.

버스가 출발하자 인솔자 유정수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꺼내든다. 6개월 만에 잡아본단다. 직장생활을 외국무역업체에서 시작했으나 어려서부터 품었던 세계일주의 꿈을 이루고자 일찌감치 관광회사로 전직(轉職)했고, 크루즈 관광안내까지 겸하여 수교가 안 된 국가를 제외하고는 5대양 6대주 거의 모든 나라를 다녀왔다고 한다. 지난 이른 봄, 불의의 자전거사고로 아킬레스건을 크게 다쳐 6개월간 수술 및 물리치료를 받고 복직하여 첫 번째로 우리팀을 인솔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인 소개에 이어 계절별로 해외관광하기 좋은 곳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19년 경력의 여성 전문가이드이다.

사과나무 농원에 낙과(落果)들이 많이 보인다. 평원이 구릉지대가 되고 다시 고산지대로 바뀐다. 나무들도 포플러, 소나무 등 키가 큰 수목으로 바뀐다. 안탈리아로 남하하는 길은 멀었고 동서로 뻗은 ‘숫소’ 라는 의미의 토루스 산맥(Taurus Mts.)을 넘어야 한다. 산 중턱을 오르다가 차량에 급유도 할 겸 주유소가 있는 휴게소에 들렀다. 물레방아가 있는 가든(garden)형 음식점이 있고 그 옆 계곡가까이 놀이터에는 다양한 어린이 놀이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터키는 석유매장량이 풍부하지만 유류가격이 우리나라보다 높다. 휘발유 가격이 1리터에 한화로 환산하여 2,800원까지 치솟기도 했단다. 그 이유는 터키와 그리스간의 영토전쟁 결과 1923년 7월 24일 로잔느(Lausanne) 조약에서 양국간에 현재와 같은 영토경계가 확정됨과 동시에 터키는 2023년까지 100년간 자국의 석유생산을 안하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시리아에서 원유를 수입해 왔으나 양국간 관계 악화로 지금은 러시아로부터 수입하여 정유해서 쓰고 있다.

버스는 해발 1829m에서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바람도 거세진다. 도로변 허름한 과일노점상에 잠시 정차하여 총무님과 손경 여사가 바나나, 석류 등을 한보따리씩 산다. 운전기사 라민스씨가 더운물을 끓여 커피믹스를 종이컵에 타서 일일이 따라주고 다시 출발한다. 벌거숭이 바위산 경사면이 잘게 조각조각 갈라져 있다. 그럼에도 그물망이나 또 다른 안전장치 하나 보이지를 않는다. 폭우라도 쏟아지면 원격지 도로위로 낙석들이 와르르 굴러 내릴 게 분명한데,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구절양장(九折羊腸) 꼬불꼬불한 산길을 운전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운전해 내려간다. 트럭운전사였던 부친으로부터 10살 때부터 운전을 배워 36년의 경력을 갖고 있다. 마침내 진행방향이 서쪽으로 바뀌고 좌측으로 에메랄드 빛 지중해가 나타난다.

안탈리아는 터키령 지중해로 이어지는 관문으로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세련미가 어우러진 곳으로 서울과 비슷한 1,1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안탈리아 시계(市界) 안으로 진입하자 잔뜩 찌푸렸던 하늘에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진다. 강수량이 적은 터키인들은 “축복이 내린다.”고 말한단다. 잠깐 내린 빗물이 도로에 넘치고 인접한 낮은 농작지가 물바다를 이룬다. 1년 내내 온화하고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지역이라 도로변에 야자수도 보인다. 집집마다 모두 지붕위에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되어 있다. 온수사용을 위해서란다. I.C. Airport Hotel 도착시각은 정각 오후 5시. 유니폼차림에 여행가방을 끌고 들어오는 항공사 여승무원들이 많이 눈에 띤다. 3층 객실 베란다 유리문을 통해 호텔 뒤쪽을 내려다보니, 녹색 야자수 숲속에 연한 갈색 대리석타일 데크로 둘러싸인 에메랄드 빛깔의 Pool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색상의 조화를 이룬다. 저녁식사 후에 ‘늦게 배운 당구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완용이를 위시한 5명이 호텔내 당구장에 들어가 한판 겨루기로 객고(客苦)를 풀었다.

10월 18일(목) 여행 5일차 -안탈리아/파묵칼레

이제는 회원 모두가 시차(時差)와 함께 터키 음식에도 적응이 되어 입맛에 맞는 요리들을 잘도 찾아내 먹는다. 고급스런 분위기 속에서 정승처럼 아침식사를 했다. 짐을 싸들고 로비에 나와 출발대기 중인데 창가 한쪽 구석에 피아노 한 대가 보인다. 완용이 집사람이 피아니스트인 것을 알고 병호가 접수대에 가서 여성 근무자에게 피아노 키를 부탁했지만 열쇠의 소재를 몰라 허여사님의 터키방문기념 피아노 연주회 관람기회를 놓쳤다.

‘성안’이란 뜻을 지닌 ‘칼레이치’로 시내관광을 떠났다. 보존이 잘 된 로마시대의 항구도시 구역이다. ‘칼레 카프스(성문)’라고 불리는 중앙광장 앞 도로에서 하차하여 몇 걸음 옮기는데, 질주하는 소형승용차 양쪽 문 옆으로 송아지만한 개 두 마리가 바짝 붙어 우렁차게 짖어대며 쫓아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지중해 해안 방향으로 이동하니 도로 아래쪽에 이블리 미나레(Yivli Minare)가 보인다. 13세기에 만들어진 38m 높이의 적갈색 첨탑으로 안탈리아의 상징이다. 8개의 세로 홈이 파져 있고 모자이크 형태로 된 푸른 돌과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줌후리예트 광장에 들러 <아타튀르크 기마상>을 둘러보고 웅장한 지중해 해안의 경치를 바라본다. 좀 전에 승용차를 뒤쫓아 가며 짖어대어 우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개 두 마리가 한 무리의 개를 이끌고 나타나 우리들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털이 짧고 근육질의 누렁이가 우두머리로 보인다. 개들 모두 왼쪽 귀에는 노란색 가죽위에 숫자가 찍힌 동물등록인식표(또는 광견병예방접종확인표시)가 부착되어 있었다. 우리집에 만12살이 넘은 수컷 진도견이 금슬 좋던 짝꿍을 여의고 건강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는데 지금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되돌아 나와 트램(전차)이 다니는 중앙도로를 10분 쯤 걸어 <하드리아누스의 문>에 도착했다. BC130년 로마 하드리아누스황제가 안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세워진 건축물로 대리석으로 된 3개의 아치를 기둥 4개가 받치고 있으며 양끝에 탑이 있다. 옛 그리스 마을과 새 로마인 마을을 구분하는 문이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예전 오스만 시대의 전통가옥들을 복원하고 일부 개조하여 펜션, 호텔, 숍으로 이용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2층건물의 1층 바닥면적보다 2층 바닥면적이 더 넓다는 것이다. 옛 주택가 대리석 도로를 쭉 따라가다가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오랜 역사를 지닌 석조건물 Korkut Mosque 옆을 지난다. 영문 안내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2세기에 절(temple)로 지어져 6세기에 무너져 교회(church)로 건립되고, 7세기 아랍침공으로 무너져 9세기에 수리하였으나 셀주크 시대에는 회교사원(mosque)으로 바뀌었다, 1361년 안탈리아가 사이프러스왕 피터 1세에게 점령당하자 또다시 교회(church)로, 술탄 베야지드 2세의 아들 코르쿠트 왕자(Prince Korkut) 통치시대에는 다시 회교사원(mosque)으로 바뀌었다가 1896년 화재로 2층이 크게 파손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칼레이치의 남서쪽 끝 모퉁이에 있는 <카라알리울루 공원>으로 갔다. 하늘의 절반은 구름에 가려 있다. 지중해와 그 맞은편에 솟아있는 산맥이 한눈에 볼 수 있어 멋진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발아래 터키 깃발이 게양된 2층 구조의 흐드룰르크 성루가 보인다. 그 바로 뒤는 바다로 떨어지는 암석 절벽이다. 허리 높이의 대리석 담장 위로 대장견 누렁이가 성큼 뛰어올라 머리를 들고 가로로 엎드려 머리를 든 채 포즈를 취한다. 이집트의 스핑크스 모습이다. 차례차례 개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예전에 이곳을 지키던 창을 든 병사의 동상을 보고 해안가로 내려간다. 지난 9월29일부터 10월6일까지 열린 2013 세계양궁대회가 강풍 속에 무리하게 속행되고 한국 신현종 감독이 뇌출혈로 사망한 <안탈리아 센테니얼 양궁장>도 이 해안의 벨레크 리조트에 있다.

마리나항구는 2세기부터 안탈리아를 기점으로 지중해를 오가던 배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지금은 근처에 새로운 항구가 생겨 관광지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바다를 왼편에 항구로 내려간다. 길게 뻗어나간 선착장 양편과 해안가에 선수(船首)부분을 대고 정박한 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해안을 따라 도는 길 우측으로 성벽이 둘러져 있고 성벽 위에는 집들이 얹혀 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보트투어를 하는 관광객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갑판위에 후크선장 인형이 서있는가 하면, 일본 사무라이 모형이 서있는 보트도 있다. 항구 반대편 끝에 오르막길 양편으로 늘어선 찻집, 음식점, 상점들이 손님을 기다린다. 대장견 이하 다른 개들은 항구내에서 흩어졌고 검정개 한 마리만이 우리가 함께 출발했던 <아타튀르크 기마상>으로 되돌아왔다. 2시간에 걸친 동행이었다. 줄만한 간식이 없어 미안한 마음으로 헤어진다. ‘고맙다. 너를 잊지 않으마!’

10시에 다음 행선지 파묵칼레를 향해 출발한다.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에 햇볕도 따사롭다. 중도에 현지(現地)식 점심식사를 하였다. 파묵칼레 못미처 <데니즐리>라는 직물로 유명한 도시가 있다. ‘해안가’라는 의미인데 아나톨리아 서부의 내륙에 위치하면서도 그런 이름을 사용한 것은 옛사람들이 해안을 동경해서란다. 현지인솔자가 안내한 아울렛에 들어갔다. 의류와 직물침구류, 구두 등을 판매한다. 입장 시 10% 할인 쿠폰을 한 장씩 배포하지만 흥정을 잘 하면 정가의 50-60% 선에서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아울렛을 나오면서 기념품가게에서 냄비받침 80개를 주문하니 신문지로 낱개 포장을 하는 주인아저씨의 손놀림이 바쁘다. 터키 남성들도 국방의 의무가 있다. 의무복무기간은 15개월이나 대학생활 만2년이 경과하면 복무기간이 5개월로 대폭 단축된단다. 학업에 대한 부모나 자녀들의 관심도가 그만큼 낮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오늘도 5시간 장거리 여행 끝에 파묵칼레(Pamukkale)에 도착했다. 파묵칼레의 주요 볼거리는 새하얀 석회붕과 히에라폴리스 유적이다. 석회붕은 수많은 세월 동안 상부에서 흘러내린 온천수의 석회성분이 결정체가 되어 만들어진 자연의 작품이다. 하얀 목화로 덮어 놓은 것 같아 ‘목화의 성(cotton castle)'이라고도 불린다. 한편 히에라폴리스는 BC 190년경 페르가뭄(Pergamum)의 국왕 <에우메네스 2세>가 세운 <신전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고대 유적지이다. 로마제국의 고위관료들을 위한 여름휴양지였으며 계속되는 지진으로 재난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1334년 거대한 지진이 도시를 덮친 후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두 곳 모두 새하얗게 침식된 언덕 꼭대기의 거대한 단지에 자리하고 있다.

티켓 한 장으로 석회붕과 히에라폴리스를 모두 둘러볼 수 있으나, 오후 3시 입장으로 히에라폴리스 관람은 포기해야 할 형편이다. 남쪽 문으로 진입하니 오른편에 히에라폴리스 유적의 잔재(殘在)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개발 또는 복원 중인 지역이 많이 보인다. 지금까지 옛 히에라폴리스의 개발면적은 13%에 지나지 않는단다. 반듯한 석재 신작로 좌우 넓은 공지 곳곳에 야자수들이 서 있다. 좌측 아래쪽에는 파묵칼레 관광의 하이라이트라는 석회붕이 신비한 백색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 강원도 산비탈의 두렁길이 있는 계단식 전답처럼 새하얀 석회붕이 층층이 아래로 내려 뻗어 있고 맨 아래에는 흘러내린 물이 모여 코발트블루 색의 호수를 이루고 있다.

석회붕 상부 언덕에 도달하니 풀밭에 데니즐리市를 상징하는 수탉(Rooster) 1마리가 철재닭장에 갇혀 있고, 닭장 밖 풀밭에는 검은 암탉 서너 마리가 자유롭게 먹이를 쪼아 먹는다. 닭의 수명은 20년이라는데 2개월을 못살고 몸 보시(布施)하는 병아리가 얼마나 많노! 목재데크 한쪽에 신발들을 벗어 모아놓고 바지자락을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맨 위층 테라스로 내려선다. 과거 개발초기에 산 정상부분을 무분별하게 파헤쳐 현재는 방류량이 엄청 줄었단다. 앉아서 따끈한 온천수에 족욕(足浴)할만한 빈자리를 찾아보건만 이미 만원이다. 조심조심 물길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수온이 급격히 낮아진다. 우리들은 주변의 경이로운 광경을 감상하고, 포즈를 취하고 사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관람마감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밖으로 나와 신발을 신고 소지품을 챙긴다. 1세기경에 길이80m, 높이5.5m 크기로 지어졌다고 추정되는 체육관건물(Gymnasium) 잔해가 있는 곳을 돌아보고 히에라폴리스 고고학 박물관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맞은편에 지진과 전쟁으로 형체가 없어진 중세성(中世城: Medieval Castle) 돌무더기에서 자유롭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히에라폴리스에서 그나마 원형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유적지인 원형극장(Roman Theatre)이 근거리에 있지만 우리는 남쪽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야 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도 살짝 부는 을씨년스러운 날씨다.

팜 테르말 호텔(Pam Thermal Hotel)에는 여행자들로 초만원이다. 실내 및 야외온천 시설이 있는 호텔 본관 뒤편의 별관에 방배정을 받았다. 땅거미가 질 무렵 실내온천장에 들렀다가 파묵칼레의 석회붕 모양을 본 따 만든 야외온천으로 올라갔다. 중앙 상부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뿜어져 나온 뜨거운 온천물이 계단식에 방사형(放射形) 으로 뻗어 내린 석회붕형 욕조들을 차례로 채우고 넘치며 아래로 흘러내린다. 수심은 깊지 않으나 욕조 바닥에는 머드(mud)가 깔려있다. 우리는 몸을 더운 물에 푹 담그고 누적된 피로를 풀었다. 온천수가 지상으로 낙하되면서 석회질이 종유석으로 자란 것처럼 위장하여 건물 처마 밑 전체가 야간 조명 빛에 마치 세로로 주름 잡힌 붉은 커튼처럼 보인다.

뷔페식 저녁식사 후 <술 세미나>가 있다 하여 로비에 집합하니 현지인솔자가 멀리 떨어진 마을의 어느 주점으로 안내한다. 홀(hall)은 외부가 보이는 유리문이 많고 요리장소가 같이 있어 다소 산만한 분위기였다. 중앙에 식탁을 일렬로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입구 벽 쪽으로 조그만 무대가 나와 있고 노래방기기 같으나 처음 보는 컴퓨터 음향기기가 서있다. 무대 위 의자에는 가수로 보이는 남성이 앉아 우리나라 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른다. 우리보다 먼저 온 내국인 손님들이 있고, 또 다른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이 들어와 무대 가까운 쪽으로 자리 잡는다. 양갈비 숯불구이를 주문하고 라크와 에페스(Efes)맥주를 시킨다. 라크(raki)는 터키를 대표하는 전통주이다. 신선한 포도를 으깨어 물과 섞어 쪄낸 후 아니스(anise)라는 독특한 향이 나는 열매를 넣고 증류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물을 이용해 알코올 농도를 45%정도로 조절하고 두 달 정도 숙성시켜 만든다. 라크에 물을 추가하자 하얗게 변하였다. 터키인들이 라크를 <사자의 우유>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수가 무대로 나가 ‘탐 존스’의 를 시원스럽게 부르고는 앙코르 박수에 를 한 곡 더 부른다. 나이가 들어도 과거의 명성 그대로 최고의 가객(歌客)이다. 나도 무대 앞으로 나가 신청곡을 입력 했지만 멜로디는 나오는데 화면에는 가사가 나오지 않아 시작하자마자 반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옆자리 한국 손님들도 동참하기 시작했고 강영희/이정순 두 회원이 <목로주점>을 합창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댄스 음악이 나오면서 술집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중년의 터키인 부부가 나와 부드럽고 우아하게 때론 신나게 춤을 춘다. 종종 손목을 재빨리 재끼며 스냅을 주는 부인의 춤동작이 인상적이다. 우리 팀 병호와 에어로빅을 20년간 해 오신 강영희 여사의 춤솜씨는 이웃 한국인 젊은 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술(酒) 세미나(sul seminar)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10월 19일(토) 여행 6일차 - 에페스/트로이

오전 6시 30분 출발이다. 하늘에 둥근 달이 환하게 빛나고 우리는 포장 주문한 대형 햄버거, 딸기주스, 사과로 버스內 아침식사를 한다. 7시가 지나면서 달리는 버스 뒤편에서는 여명이 밝아오고, 서편에 달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며 앞산 너머로 사라져 간다. Sun rise, Moon set. 출국 1주일 전(10월 7일)에 동네 문화관 하모니카 중급반에서 등록 1주년 기념으로 하모니카 2개(Am과 C#)를 가지고 불었던 곡명이 'Sunrise Sunset' 이다. 여행용 가방을 싸면서 부인은 하모니카 한 세트(3개)와 하모니카 교본을 갖고 가라고 강요하고, 나는 짐이 무겁다고 거절하면서 부부싸움 제1라운드를 이미 벌인 바 있다. 달리는 도로 우측으로 나란히 협궤철도가 놓여있다. 시골 마을이 나타나고 광활한 산야(山野)에 올리브, 오렌지, 석류, 무화과 등 과일나무들이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출(日出)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터키인을 포함하여 서양인들은 일몰(日沒)을 중요시 한다고 한다. 옛부터 해가 넘어가는 곳에 영혼의 세계가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터키 최고 장수(長壽)마을인 <아이든>을 지나 <에페스>로 가는 도중 Naturel 이라는 간판이 서있는 양피의류판매회사에 들렀다. 책임자로 보이는 키 큰 중년 미남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중앙에 T자형 스테이지가 놓여 있고 조명이 화려한 패션쇼장(Fashion Showhouse)이었다. 훤칠한 미남미녀 패션모델들의 경쾌한 오프닝 의상 쇼가 있은 후 김윤수, 손경, 이정순 즉석모델 3인들과 현지모델 3인과의 쌍쌍 의상 쇼가 이어졌다. 윤수는 4년 전 배재8360 뉴질랜드환갑여행 당시 <크라이스트 처치>의 어느 양모의류면세점에서 즉석모델로 발탁된데 이어 두 번째이다. 매장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고급 제품들이 무진장 진열되어 있다. 회원들은 터키여행 며칠 동안 터득한 흥정기술로 적정한 가격에 적당히 매상을 올려주고 나왔다.

에페스는 지중해의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터키 최대의 고대도시이다. 터키어로는 에페스이나, 영어로는 에페수스(Ephesus),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에페소(Epheso)라 부른다. 동부지방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로서 거의 150년간에 걸친 발굴 작업에도 현재 옛 도시 전체의 18% 정도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에페스에 도착한 우리는 높은 지역에 있는 남쪽 문(Magnesia Gate)을 통해 들어간다. 우측에 1세기에 만든 바리우스(Varius) 목욕탕이 있다 로마시대 목욕탕은 지인들과 어울려 함께 때를 벗겨내고 마사지도 받는 사교(社交)의 장(場)이기도 했다. 좌측에 위쪽 아고라(Upper Agora)는 정치활동이 열렸던 곳으로 현재는 폐허가 되어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발굴하면서 모아놓은 돌과 수도관들이 쌓여있다. 아고라가 끝나는 곳에서 헤라클레스의 문을 들어서면 쿠레테스의 거리가 시작된다. 쿠레테스 거리(Curetes Way)는 넓은 도로가 온통 대리석으로 깔려 있고, 도로변을 따라 좌우로 원통형 기둥이 일직선으로 줄지어 서 있다.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에 오데온(Odeon)이라 불려진 5000석 규모의 소극장이 보인다. 시정(市政) 논의를 위한 집회 장소이자 공연이나 강연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폐허만 남은 시청(Prytaneum)과 도시보물창고 유적에는 도리아식 석주 2개가 남아있다. 당시 이곳에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거대한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거리 중간쯤에 이르면 언덕을 등지고 트라이아누스의 샘(Trajan's Fountain)유적이 있다. 2세기 초 이곳을 방문했던 로마의 트라이아누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원래는 9.5m 높이의 2층으로 된 거대한 건축물이었다는데 지금은 훼손되어 예전 모습은 볼 수 없다. 이 샘은 황제의 석상 발끝에서 물이 흐르는 구조였다고 한다.

규모가 큰 테라스式 주택단지 앞을 지나니 하드리아누스 신전(Temple of Hadrian)이 나온다. 이 신전은 구석구석이 일정한 양식의 문양으로 치장되어 있다. 신전 내부 첫 번째 아치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Tyche)의 조각상이 있고 두 번째 아치에는 뱀 머리칼을 휘날리며 서 있는 메두사의 석상이 있다. 이곳을 지나니 에페스 유적들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켈수스 도서관 (Library of Celsus)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2세기 초 소아시아의 총독이었던 켈수스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가 건립했다고 한다. 건물 앞문은 코린트식 기둥들이 서 있고 그 사이사이에 소피아(Sophia: 지혜), 아르테(Arte: 덕성), 에노이아(Enoia: 학문), 에피스테메(Episteme: 지식) 등 네 가지 미덕(美德)을 상징하는 여인들의 석상들이 서 있다. 건물 정문 앞 계단과 광장에는 에페스의 명소를 보다 가까이서 보려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 도서관은 약 1만2천권의 두루마리 문서를 보관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우리는 아래쪽 아고라(Lower Agora) 옆을 지나 아르카디안 거리 끝에 있는 대극장(Great Theater)으로 갔다. 기존의 건물은 비잔틴 시대(기원전 3세기-1세기)에 지어졌다. 로마시대에 이르러 81년에서 117년 사이에 확장 개축되어 약 2만5천명을 수용할 만큼 거대한 부채꼴 형태의 극장이 되었다. 원래 이곳은 연극과 문화예술을 위한 극장이었으나 로마시대 말기에는 검투사들의 경기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아래 중앙부분 무대에서 내는 목소리가 수십 미터 떨어진 계단 상단 관람석까지도 잘 들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상층부 관람석에 먼저 올라온 우리들은 뒤에 처져 올라오는 윤수를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가 서게 하고 노래 한곡을 청했다. 쾌히 승낙한 윤수는 무대 쪽을 향해 돌아서서 세계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아일랜드의 민요 ‘You Rase Me Up'을 우렁차게 부르기 시작한다. 무대를 향해 좌측 관람석에 모여앉아 있는 몇 그룹의 단체여행객들과 멀리 떨어진 무대광장 위에 있는 관광객들이 일시에 ‘동작 그만’ 상태로 전환되며 윤수를 바라보고 경청한다. 대한민국 배재학당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터키의 고대도시 에페스의 대극장을 방문하여 한류문화(韓流文化)의 맛보기공연을 선사한 것이다. 곡이 끝나자 대극장 안에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보내준다.

에페스를 떠난 버스가 잠시 후 구불구불한 좁은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초록 빛 올리브나무가 가파른 산등성이와 산허리를 온통 뒤덮고 있다. 차창 밖 풍경에 정신 파는 사이에 언덕 경사면에 새하얀 집들이 늘어선 작은 산간마을에 도착했다. 1924년 터키와 그리스의 인구교환 당시 그리스인들이 떠나고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터키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다는 터키 속의 그리스, 슈린제 (Sirince)마을이다. 미술박물관(Museum)으로 보이는 고풍스런 건물에 딸린 레스토랑으로 갔다. 사방이 탁 트인 야외식탁에 앉아 양갈비구이 피르졸라(pirzola)를 주문한다. 윤수와 근수가 이 마을의 특산품인 와인 3병을 주문하여 일행이 다 함께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산비탈 나무숲에 파묻힌 갈색 지붕과 새하얀 외벽의 아담한 집들이 매우 정겹다.

12시 정각에 출발한다. E-87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 반 가량 달려 에게해 연안에서 가장 크고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이즈미르(Izmir)에서 잠시 정차한다. 가을하늘이 구름한 점 없이 맑고 푸르다. 온도계시기는 22도를 나타낸다. 왼쪽으로 에게 해 푸른 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은 1924년 로잔느 조약에 따라 모두 그리스 영토에 귀속되어 있단다. 아이발르크(Ayvalik)를 지나며 마이크를 잡은 이기섭 인솔자의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한 단편적인 강의가 있은 다음, 2004년에 제작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트로이>에 대한 비디오 감상에 들어갔다. 다음 행선지가 트로이이기에 유적지 방문에 앞선 예습이다. 오래 전에 관람한 영화라서 나는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꽤나 많은데, 내 바로 등 뒤 좌석에 앉은 윤수는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있다. 일단 버스에 타면 먹고 마실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좌석팔걸이를 올리고 길게 누워 편히 잠들던 그가 오늘 이 시간만큼은 정신이 말똥말똥하고 두 눈은 초롱초롱하다.

트로이(Troy)는 그리스의 장님시인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일리아드>에는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네 등의 다양한 神의 이야기와 아킬레스, 헥토르 등의 영웅을 등장시키면서 트로이 전쟁을 화려한 신화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이 전쟁과 그리스에서 일어난 미케네 문명과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트로아스 문명의 충돌사건이고, 결국 미케네 문명이 승리하면서 아나톨리아에 그리스 문화가 보급되는 계기가 된다. 이때 아나톨리아에 퍼지게 된 그리스 문명을 ‘헬레니즘 문화’ 라고 하는데, 헬레니즘이라는 말의 어원은 바로 <일리아드> 작품 속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導火線)인 절세 미녀 ‘헬레나’에서 나온 것임을 인용해 둔다. 나는 <일리아드 오디세이> 번역소설을 45년 전에 읽고, 중국소설 <삼국지>와 비교평가하며 독후감을 써냈던 기억만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요즈음 기업체에서 많이 쓰이는 멘토(mentor: 조언자/스승)는 오디세이(Odyssey)의 주인공이고 이타카 왕국의 오디세우스(Odysseus)왕이 뜻하지 않게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게 되자 친구이자 신하인 멘토에게 자신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부탁했고 이에 멘토는 10년 넘게 교육을 시키며 친구이자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 역할까지 도맡아 한 데서 유래한다.

점심식사 후 꼬박 5시간 이동하여 마침내 트로이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 총 8시간을 버스 안에서 보냈으나 표정들이 밝고 보행자세들도 꼿꼿하다. 팀원 모두가 이제는 장거리 버스이동에 내성(耐性)이 붙고 이력이 난 게다. 유적지 입구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대리석판 광장 중앙에 트로이 목마가 눈에 들어온다. 높이 30m의 이 모형은 호머의 작품에서 묘사된 크기와 모양을 참조해 1975년 터키 조각가가 제작한 것으로 목마 안에는 30-40명이 들어갈 수 있다. 나무계단을 타고 2층과 3층으로 올라가 작은 내부창문을 통해 얼굴을 내밀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적은 모두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층마다 시대를 달리해서 세워진 도시를 이룬다. 가장 오래된 제1층은 기원전 3000-2500년경의 유적지이고 제6층이 기원전 1,700-1,250년의 시기로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곳이다. 제9층은 헬레니즘 및 로마시대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트로이는 한 자리에서 3300년간 각각 다른 9개 왕조가 세워졌다 사라진 셈이다.

유적지 내부는 꽤 복잡하여 원형도로를 따라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불레우테리온(Bouleuterion:의회 회의장)으로 들어가 남문(South Gate)을 지나 시계방향으로 돌면 과거 음악회가 열리던 로마식 오데온(Odeon: 극장)과 만나는데 관람석계단 앞 공터에는 파손된 건축물 조각들이 뒹굴고 있다. 트로이6기 궁정단지(Palace House)의 벽면이 자리한 곳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슐리만의 시범해자(垓字:도랑)가 나타난다. 이것이 도시의 각 부분을 곧게 가로지르는데, 해자 측면에는 총9개에 달하는 도시지층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90)은 독일인 사업가로 1871년 오스만 정부의 승인을 얻어 최초로 트로이 발굴 작업을 했던 사람이다. 트로이2기와 3기 성벽, 트로이1기의 상류층 주택지 유적지를 지나, 마지막으로 트로이9기 아테네 신전(Athena Tempel) 유적까지 둘러보고 고대도시 트로이의 유적지 관람일정을 모두 끝맺는다. 목재 데크로 된 통로를 따라 나오며 멀리 펼쳐진 황색의 평원과 그 뒤편의 푸른 에게해를 바라본다. 어느덧 버스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문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는 해가 서산마루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해안을 따라 북으로 40분을 달려 다르다넬스 해협의 대형 항구도시 차낙칼레(Canakkaale)에 도착하여 콜린(Kolin)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10월 20일(일) 여행 7일차 - 차낙칼레/이스탄불

아시아의 차낙칼레에서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을 건너 유럽의 겔리볼루 반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들은 새벽잠을 설치며 랍세키(Lapseki)항으로 달려갔지만 7시 첫 출항 페리를 간발(間髮)의 차(差)로 놓치고 말았다. 후속 페리에 승선하여 우리는 작고 아름다운 항구마을 겔리볼루(Gelibolu)에 도착하였다. 가장 좁은 다르다넬스 해협의 폭은 1500m도 채 안 된다. 겔리볼루 반도는 지난 1000년의 세월동안 이스탄불로 이어지는 핵심관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호주, 뉴질랜드, 인도 연합군이 겔리볼루 반도에 상륙했으나 터키군(오스만 군대)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저지한 지휘관이 무스타파 케말 대령((후일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이다. 그의 눈부신 전공으로 케말은 파사(장군)로 진급한다. 1916년 1월까지 계속된 처참한 겔리볼루 전투에서 사망자 수만 해도 대영제국 약 3만 6천명, 프랑스군 4만 7천명이고 터키군은 8만 7천명에 달한다.

버스는 겔리볼루 반도를 지나 ‘아이딕’에서 잠시 휴게소에 들른 다음 ‘마르마라 해’ 해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계속 달려 마침내 2500km 터키 대장정(大長征)의 종착지인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관광 첫날 점식식사를 했던 ‘파타라 레스토랑’에 다시 들어가 이번에는 ‘고등어 케밥’으로 포식을 했다. 인근해안 도로변 어시장(魚市場)으로 나가니 갈매기들이 주변 상공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데 그 수(數)를 어림잡을 수조차 없다. 그렇게 많은 갈매기 무리는 난생 처음 본다.

관광 첫날에 왔던 히포드럼을 벗어나 <블루모스크>로 간다. 정식 이름은 ‘술탄 아흐메트 자미(Sultan Ahmet Camii)’이다. ‘자미’는 이슬람 사원을 말하는데 터키어로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 이라는 뜻이란다. 웅장한 규모의 안뜰로 들어서니 육중하고 아름다운 곡선과 완벽한 비율로 멋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모스크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블루모스크에는 6개의 미나레트(첨탑)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첨탑이 4개 이상은 술탄이 지은 것이라 하는데, 원래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의 모스크에만 첨탑 6개를 세우는 것이란다. 벽들은 수 십 만개의 이즈닉 타일(Iznik tile)로 치장되어 있어 "Blue Mosque"라고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이슬람이나 유럽 국가들은 부(富)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청화 백자를 소유했는데 이를 대신해서 이즈닉 지역에서 생산됐던 백색 바탕에 푸른색 안료로 문양을 그려넣은 이즈닉 타일을 이용해 부와 화려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건물 우측으로 걸어가다 보니 건물 외벽 하단에 수도꼭지들이 일정간격으로 달려 있고 그 아래 작은 배수로가 있는데 돌의자에 사람들이 앉아 손발을 닦고 있다. 신도들이 사원에 들어가 경배 드리기에 앞서 몸을 청결히 하는 것이란다.

신도들만 중앙입구로 입장하고 우리들은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남문으로 가서 비닐봉지를 받아 신발을 넣어들고 안으로 들어간다. 모스크 내부도 웅장하기 그지없다. 높이 43m, 직경 34m의 거대한 중앙돔을 4개의 중간돔과 4개의 ‘코끼리 발’ 기둥이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지지해주고 있다. 돔 아래 벽을 장식하고 있는 260개의 채색창과 거대한 샹들리에가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설교단(說敎壇)은 진주(珍珠)들로 장식되고 2층 창까지의 내벽과 기둥들은 여러 형태의 화려한 타일들로 덮어씌워져 있다. 융단이 바닥전체를 덮고 있고 내벽에 붙여지은 소예배당마다 신도들이 들어앉아 기도드리고 있다. 건물 밖으로 나와 잘 가꾼 정원에서 사진을 찍는다. 열 살 가량의 사내아이가 흰색의 화려한 술탄 아흐메트 복장으로 어머니와 함께 있다. 빙 둘러선 관광객들의 카메라 세례에 아이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고, 아이 어머니는 너무나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 아흐메트는 13세의 나이에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이 모스크가 완공되고 1년 후 27세에 요절하였다.

예정된 방문지는 아직도 많은데 하루해가 너무 짧다. 낚시꾼들이 몰려 있는 갈라타 다리를 건너 서둘러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으로 간다. 정문 앞에는 대형 시계탑이 있고 정문에는 대리석을 사용한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장식들이 돋보인다. 이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의 하나로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보스포러스 해협 바다를 메운 곳에 세워져 ‘바다위에 궁전’이라고도 불리며 총길이가 600m에 달한다. 궁전 내부를 장식하기 위하여 순금 14톤과 은 40톤이 사용되어 화려함이 베르사이유 궁전을 능가한다고 한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니 각종 수목과 화초로 뒤덮인 정원이 있고, 중앙 연못 한가운데 있는 분수대 위 다섯 마리의 조류조각상 주둥이에서 뿜어 나오는 물줄기가 시원함을 더해준다.

입장할 때 비닐 덧신을 착용하고 사진촬영은 금지다. 궁전은 호화로운 의전용 건물과 하렘(harem: 궁전 여인들의 내궁)으로 나뉜다. 3층으로 된 건물 속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hall)이 있으며 홀과 방에는 고급 카펫이 깔려 있고 샹들리에와 촛대가 있으며 560점이나 되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천장 높이가 36m나 되는 대형홀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사한 750개 전구로 장식된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오스만 제국 술탄들이 사용하던 이 궁전은 터키공화국이 된 후, 터키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케말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했다. 1938년 11월 10일 그가 사망할 때까지 집무실로 사용하던 방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지금도 돌마바흐체 내부에 전시된 시계들은 모두 그의 사망시각인 9시 5분에서 멈추어 있다. 건물 밖으로 나와 보스포러스 해협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는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보스포러스 해협 은빛 물결이 춤을 춘다. 새파란 하늘과 시퍼런 바다가 맞닿는 건너편 아시아 쪽으로 위스퀴다르 항구마을이 오른쪽으로 뻗어나가다 바닷물 속으로 사라진다. 정원에서 어느 곳 하나도 포토 존(photo zone) 아닌 곳이 없다.

해안가 도로변에서 건물정면 간판에 태극기가 그려진 ‘고려정’이란 식당에 들어가 백반정식을 주문한다. 일주일 만에 먹어보는 우리나라 음식이라 상차림은 허접했으나 즐겁게 먹었다. 식당 우측으로 ‘Naturel’ 이란 상호(商號)의 간판이 보인다. 어제 아침 에페스 못미처에서 들렀던 의류회사의 이스탄불 영업점포로서 우리 회원 중 한 사람이 수선 요구했던 상품을 전해 받기로 되어 있는 곳이다. 내일 오후 출국 전 공항에서 받기로 하고 신규 주문을 넣는 회원들도 있다.

예약된 타이타닉(Titanic) 호텔에 체크인 하였다.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곳이다. 터키에서의 마지막 밤이라 그런지 그냥 숙소에 있기가 왠지 서운하다. 프론트에서 만나 큰 길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일요일인데다 밤바람도 스산하고 변두리라 그런가 밤거리가 한산하다. 도로 양쪽으로 불 꺼진 자동차 부품상이 계속 이어진다. 한참을 걸어가도 문을 열어 놓은 술집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슬람교 국가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찻집은 왜 없는 거야! 이따금 영업 중인 소형마트만이 눈에 띌 뿐이다. 왔던 길로 되돌아와 헤어져 일찌감치 객실로 올라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는 나는 오늘 밤에도 오늘 하루동안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요점정리 해둔다. 뉴질랜드와 스페인/포르투갈에 이어 이번이 마지막 여행기가 될 것이다.

10월21일(월) 여행 8일차 - 이스탄불

이스탄불을 찾는 사람들은 물건을 사든 안사든 꼭 들리는 곳이 있으니 바로 4500여 개의 가게로 이루어진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이다. 터키 이름으로는 카팔르 차르쉬(Kapalicarsi)로 ‘지붕이 덮인 시장’ 이라는 뜻이다. 유럽 구시가지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실크로드의 최종 종착지로서 동서 문물의 교환 장소였다. 시장 입구에 도착하자 인솔자는 1시간 후에 반대편 출입문에서 만나자며 길을 잃었을 때 쉽게 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중앙 큰길 좌우에는 주로 귀금속 같은 화려하고 고가(高價)의 상품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차지하고 있다. 중앙로를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가 미로(迷路)같은 시장골목을 부지런히 누벼본다. 양탄자, 도자기, 각종 직물류와 피혁제품류, 예술품 등 값비싼 물건부터 ‘악마의 눈’ 같은 값싼 기념품에 이르기 까지 없는 게 없이 무진장 진열되어 있다. Old Bazaar로 들어가니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물건들과 골동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런 말이 있다. “그랜드 바자르에 가기 위해서 당신이 준비할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 당신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흥정을 위한 마음가짐이다.” 그랜드 바자르는 참말로 시장 그 자체가 훌륭한 볼거리였다.

그랜드 바자르를 나오니 곧바로 지붕 없는 시장이 이어진다. 한국의 남대문시장과 흡사하여 말귀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골라, 골라’식 호객행위를 하는 노점상도 보인다. 한 참을 걸어 현지인솔자가 안내하는 상점에 들어갔다. 젊은 한국인 여성으로부터 제품 설명을 들은 여사님들은 화장용품인 장미기름과 젤리과자류를 사서 맡겨둔다. 인근 음식점으로 이동하여 2층으로 올라가니 한국인 단체여행객들이 식사 중이었다. 우리보다 여행일정이 하루 느린 그들도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를 못 탔다하여 상호 위로하며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다. 그릴에 구운 양고기 케밥으로 식사를 끝냈다. 이슬람교신자인 남자 주인이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 중 12시 기도 중이라 잠시 기다려야 했다. 한국인 상점에 가서 맡겨 놓았던 물건을 찾고, 이제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관광코스가 되는 톱카프 궁전으로 이동했다.

터키어로 톱(top)은 포(砲), 카프(kapi)는 문(門)을 의미하는 톱카프는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톱카프 궁전의 본격적인 관람은 아야소피아 뒤편에 있는 첫 번째 문인 ‘황제의 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문을 통해 제1중정(First Court:안뜰)으로 들어간다. 정원 곳곳에 몸통과 가지가 하얀 고목들이 서 있고 개중에는 밑동이 세로로 벌어지고 그 속이 텅 빈 나무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정원에는 일반 백성들이 드나들 수 있어서 궁전 마당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 때 지은 붉은 벽돌의 성 이레네 교회가 남아 있다. 제2중정(Second Court)으로 이어지는 중문(Middle Gate)으로 갔다. 문의 몇 발짝 앞 대리석 바닥에는 오스만국의 신성한 깃발을 꽂아두던 장소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이 문은 오직 술탄과 술탄의 모후(母后)만이 말을 탄 채로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입장권을 기계에 찍고 검색대를 통과하니 우측으로 궁전의 모형이 있고, 그 너머 건물 안에 황실마차가 전시되어 있다. 중정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는 5000명분의 음식을 만들었던 엄청난 규모의 궁전주방이 있고 중정 왼편에는 황실의회실이 있다.

우리들은 먼저 황실보고(寶庫)부터 보려고 전시관 건물 앞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관람객들이 2열종대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줄 끝으로 붙어 한참을 기다려서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4개의 전시실에는 화려한 보석장식 검(劒), 칠기로 장식한 옥좌, 진주로 만든 작은 인디안 인형, 금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대형 촛대, 칼자루에 큰 에메랄드 3개와 시계 장식이 있는 톱카프 단검, 술탄 메흐메트 4세가 즉위식에서 처음 착용했던 세계 다섯 번째로 크다는 86캐럿짜리 스푼 다이아몬드 등 값지고 귀한 세계적 진품(珍品)/명품(名品)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복(至福)의 문(Gate of Fecility)'을 통과하여 바로 안쪽에 황제의 알현실로 들어갔다. 술탄은 이곳 옥좌에 앉아 선물과 공물을 가져온 각국 사절들을 만나고 국사를 논의했다. 왕과의 대화가 외부에 들리지 않도록 문밖 벽에 설치해 놓은 수돗물을 틀어놨다고 한다. 제3중정 한편에 있는 또 다른 경이로운 건물로 들어섰다. ‘성스러운 유물 보관실’ 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예언자 모하메드의 발자국이 찍힌 진흙판, 모세의 의복, 다윗의 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톱카프 궁전은 전체적으로 보아 화려하지는 않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며 400년간 호령했던 제국의 왕궁 치고는 오히려 초라해 보인다. 마지막 제4중정은 사진 찍기로 좋은 장소라서 방문자들로 붐볐다. 마르마라해와 보스포러스 해협이 맞닿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갈라타 다리를 다시 넘어 유럽신시가지에 있는 탁심광장을 보기로 했다. 여행일정에서는 빠져 있는 곳이다. 갈라타 다리를 다시 넘어 아타튀르크 다리 북단 도로변에서 내렸다. 언덕길을 올라 이스틱크랄 거리로 들어섰다. 작은 대리석 타일로 포장되었다. 폭 넓은 도로 한가운데는 이곳 뒤넬에서 탁심역 구간에 운행하는 전차(트램)의 궤도가 놓여 있다. 향수를 느끼게 하는 빨간색의 옛날식 전차이다. 탁심역 광장까지는 2km 조금 넘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인파에 휩쓸려 피로한 줄도 모르고 걷는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조성된 거리라 하며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명동거리인 셈이다. 상점과 카페 말고도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영사관 건물과 성당들도 보인다. 작은 수레를 끌고나온 빵, 군밤, 아이스크림, 옥수수 장수들은 모두 다 남자들뿐이다. 군밤 가격은 유난히 비쌌다. 어림잡아 우리나라의 3배는 되는 것 같다.

언덕 위에 있는 탁심광장에 도착했다. 과거 이스탄불의 각 지역으로 물을 분배해 주던 건물의 이름을 따서 탁심 광장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중앙에 있는 1923년 터키공화국 탄생 기념비이다. 이탈리아 조각가 피에르토 카노니카가 작품으로 192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11m높이의 대리석 조각의 한 면에는 정장 차림의 아타튀르크 대통령과 공화국 건설 주역들의 조각상이 있고, 다른 면에는 아타튀르크 군안들의 조각상이 있다. 이곳은 신시가지의 중심광장으로 터키인들의 시위가 잦은 곳이다.

출발지로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나와 병호는 4명의 여사님들과 ‘MADO’ 아이스크림 전문집에 들렀다. 장소가 협소하고 손님도 그다지 많지 않아 별로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원뿔과자에 담긴 이름 모를 아이스크림이 입안에 들어가자 의외로 맛있다. 6명은 sale 판매 이상으로 저렴한 가격에 생소하고 기막힌 아이스크림 맛을 경험했다. 마침내 회원 16명 모두 출발지에 도착하여 버스가 대기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흥미꺼리 피사체를 찾아 카메라를 꺼내들고 선두에 서서 내려가던 내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다보니 조금 전까지 뒤따라오던 일행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길 잃은 양은 이산가족을 찾아 잠시 헤매다가 이내 기억을 더듬어 버스에서 내렸던 도로까지 내려갔으나 도로변에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다. 전망이 좋은 돌계단 위로 다시 올라가 전화연락을 시도하는데, 갑자기 도로에서 돌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젊은 예수님의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카파도키아 출신 현지안내인 ‘일케르’가 찾아 나오는 길이었다. “회원 여러분 잠시나마 심려를 끼쳐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녁식사를 일찌감치 끝내고 오후 5시 30분에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안내인 및 인솔자들의 공식적인 작별인사말이 있었다. 우리들도 8일간에 걸쳐 터키의 중부와 서부 지역의 유적지 관광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주신 현지인솔자이기섭씨와 현지안내인 일케르씨, 버스운전기사 라민스씨 그리고 이번 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총괄하여 인솔해 주신 유정수님께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유정수씨의 작별인사말 중에 단편적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지 않으면 계속 1페이지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나도 한마디 보태면서 이번 배재8360의 터키여행기를 마무리 지으렵니다.

우리네 한평생은 한 권의 여행기를 써나가는 긴 여정(旅程)입니다. 각자의 인생여행기가 알차고 풍요롭고 다양한 내용으로 엮어질 수 있도록 여생(餘生)동안 힘닿는 대로, 시간 나는 대로 아직 가보지 못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봅시다. 이제부터라도 보이는 풍경 자체보다는 그 이면(裏面)과 내면(內面)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가지고 말입니다.

-글쓴이 임정호-

“ MERHABA " 2013. 11. 12 .

배재8360 한동욱, 이규봉, 김윤수, 최병호, 노근수, 이완용, 임정호, 김정수,
고순선, 손 경, 이은순, 강영희, 허옥순, 이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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