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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소한 일상을 담다.
♣... 2011년 스페인, 포르투칼

스페인 - 코르도바/그라나다

by 들국화/유채 2020. 9. 15.

6월12일(일) 여행의 둘째 날 - 코르도바/그라나다

 



톨레도에서 다음 목적지인 남쪽의 코르도바까지는 300km가 넘는 거리이며 버스로 4시간 이상 소요된다. 미리 보아두면 남은 기간의 관광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가이드의 의견을 좇아, 이동 중인 차내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영화화 한 콜럼버스《COLUMBUS 1492》를 감상하기로 하였다. 부제(副題)는《The Conquest of Paradise》이고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르 드빠르디유(Gerard Depardieu)가 주인공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역으로 나온 1992년 작 어드벤처 영화이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으로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으나, 1479년 결혼하였는데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海圖)제작에 종사하였다. 포르투갈 왕인 주앙 2세에게서 대서양 항해탐험을 거절당하자 스페인으로 갔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이 콜럼버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산타페(Santa Fe)협약’이 맺어졌는데, 스페인 왕실은 이 협약에서 콜럼버스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고, 앞으로 발견할 지역의 식민지 총독 및 부왕(副王)이 될 수 있으며, 이 직위들은 그의 자손들에게 영구히 상속되고, 그곳에서 산출된 귀금속의 1/10은 콜럼버스가 소유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핀손이라는 유능한 선장이 자기소유 선박 산타 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여 1492년 8월3일 3척의 범선대(帆船隊)를 출범하였다. 10월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의 ‘구하나하니’ 라는 조그만 섬을 발견하여 산살바도르(San Salvador : 구세주)라고 명명했다. 이어서 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였다. 그는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40명의 부하를 남겨 식민시키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하여 왕으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콜럼버스는 1493년 2차로 17척에다 1500명을 이끌고 본토 대륙을 찾으러 떠났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두었던 40명은 전멸하였으나 여기다 이사벨라 시(市)를 건설하고 인디언들에게 공납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 것 없자 1496년 본국에 돌아와 문책을 당한다. 제3차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하구(河口)를 발견하지만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반란으로 송환 당했고, 제4차 항해(1502~1504)에서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위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1506년 죽을 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다

 

중앙에 위치한 돔 아래에 제대(祭臺)가 있다. 톨레오 대성당 중앙 제단의 장식벽과 흡사한 구조이다. 성체현시대(Corpus Christi Monstrance)는 교회 행렬 행사에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중앙 첨탑에서 내려온 쇠줄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눈길을 끈다. 중앙제대 반대편에 아치형 천장을 가진 성가대(Choir)가 있다. 나무로 특이하게 조각된 성가대석(席) 세트는 정교하기 이를 데 없고, 성가대 옆에는 아름답고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정면에 있는 독서대 위의 독수리상은 황금빛을 발산한다. 제대와 성가대 사이 벤치에서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사진 찍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성당 좌우 벽을 따라 성인들을 모신 소예배실이 줄지어 있다. 신도들은 중앙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기에 앞서 자기가 좋아하는 성인(聖人)이 있는 소예배실에 들어가 개별적으로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와 로마의 다리를 건넜다. 과달키비르 강물은 석회석으로 심하게 오염돼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운전기사가 차내에 비치해 놓은 페트병 생수의 가격이 휘발유보다 훨씬 비싸다고 한들 사먹지 않을 수가 없다.

그라나다로 향하는 중도에 잡화점이 있는 지역에서 잠시 정차하여 화장실을 찾아간다는 것이 반대편 건물로 몰려갔다가 되돌아가는 촌극을 벌였다. 규봉이의 구령과 시범에 따라 체조로 굳어진 몸을 풀어본다. 가까이서 3살가량의 어린 여자아이가 체조동작들을 따라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매우 귀엽다. 총무님이 체리 1상자를 사왔는데 20명이 달려들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2kg기준, 현지 가격 약7000원/서울 某할인매장 가격 53,200원)이라 추가로 3상자를 구입하여 1상자를 추가로 풀어놓으니 역시 ‘前과 同’이다. 내일을 위해 2상자는 남겨두었다.

스페인에서 고속도로나 국도를 달리다 보면 이 나라를 상징하는 검은 황소 그림을 이따금 보게 된다. 이 검은 소는 1956년부터 1988년까지 오스보르네(Osborne)라는 ‘셰리(Sherry:스페인와인)’ 제조 회사의 기업선전용 간판이었다. 정부는 자연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이를 없애려 했으나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결국은 상업적 성격을 없애는 조건으로 존속을 허용했다고 한다. 시에라네바다 산맥 기슭에 자리 잡은 그라나다가 가까워지면서 멀리 설산(雪山)이 보인다. 현재 외부 온도는 섭씨 34도를 기록하고 있다.

그라나다(Granada)는 기원전 5세기경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도시로서,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며 발전하였고, 13세기에는 그라나다 왕국이 세워져 나사리 왕조가 열리면서 절정기를 맞았다. 1492년 코르도바와 함께 그리스도교도의 지배하에 들어가지만 그 이전 781년간에 걸쳐 지배했던 이슬람문화의 영향이 지금도 도시 곳곳에 남아있다. 시가(市街)는 다로 강(Rio Darro) 남쪽의 사비카 언덕(일명 알함브라 언덕), 북서쪽의 알바이신 언덕, 북동쪽의 사크라몬테 언덕 등 3개의 언덕과 서쪽의 카테드랄을 중심으로 하는 번화가로 형성되어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낮은 구릉지대에서 산악지대로 바뀌더니 화장실이 있는 ‘하엔’ 휴게소 못미처에서는 갑자기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깊은 협곡과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잠시 내려 비경(秘境)을 사진기에 담아보고 싶지만 갈 길은 멀고 시간은 없다. 코르도바가 가까워지면서 올리브 밭은 다소 줄어들고 누런 밀밭과 노란 해바라기 밭이 펼쳐진다. 중앙 분리대 구역에는 버드나무 잎사귀에 빨간 또는 하얀 복사꽃이 만발한 류도화(柳桃花)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도로변에는 이에 질세라 싸리나무들이 노란 팝콘들을 무더기로 터뜨리고 있다.

 

오전 6시 모닝콜, 7시 아침식사, 8시 버스출발, 이것은 여행기간 내내 불문율(不文律)이 되다시피 한 오전 일과표의 일부이다. 나이가 들어 새벽잠이 없는 친구들 중 몇 사람은 모닝콜이 있기도 전에 동네 한 바퀴를 돌고자 숙소를 나왔다. 길가에 있는 엘 그레코 미술학교 앞을 지나 톨레도 철도역 뒤편 광장에 나가니 여명이 밝아온다. 열린 창문을 통해 뮤직 사운드가 요란하게 울려나오는 승용차 안에서 젊은이들이 손을 내밀고 우리들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지나간다. 이들은 주말에는 쉬는 커피숍 등을 통째로 빌려 올나이트를 하고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청년들이다. 광장 중앙에서 어느 왕인가의 기마상을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2층 구조의 다세대주택형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는 이름 모를 식물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고, 담벼락을 끼고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면과 2층 복도와 난간에는 화분들이 줄줄이 걸려 있어 보는 사람들의 넋을 빼앗는다. 골목 끝의 빠끔한 틈새로 메스키타의 우뚝 솟은 첨탑이 살짝 보인다.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마을 깊숙이 들어가니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둔 하얀 회반죽의 벽과 발코니에 빨간 꽃이 핀 제라늄 화분들이 매달려 있다. 이곳은 ‘꽃의 골목’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으로 유난히 붐비고 있었다.

 

 

 

 

 

 

 

 

 

 

 

 

 

 

 

 

 

 

 

 

 

 

 

Abades Nevada Palace 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고 자유시간을 가진 다음, 저녁식사 하고 느지막해서 알바이신(Albayzin) 언덕으로 플라멩코(Flamenco)를 구경하러 올라갔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방랑생활을 하던 집시(gypsy)들은 15세기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정착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는데 그 상징이 플라멩코였다. 여기서 집시(Gypsy)라는 말은 영국인들이 집시를 이집트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온 이집트인(Egyptian)으로 잘못 알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초기에는 생활 속의 애환과 사랑 등 일상적인 것을 주제로 노래하며 손뼉 치는 것이 주요 연주수단이었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지금은 플라멩코에 빼놓을 수 없는 기타와 캐스터네츠가 도입되고 더불어 발구르기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노래(칸테), 바일레(춤), 기타(토케)가 삼위일체로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플라멩코가 완성되는 것이다. 무용수의 끝없이 움직이는 손동작은 이상과 꿈을 잡으려는 것이고 하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골목을 빠져나와 포트로 광장으로 갔다. 광장 중앙에 세월의 향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허름한 분수대가 있는데 그 위에 두 앞다리를 들어 올린 망아지 조각상이 있다. 시내 관광마차를 끄는 말들이 지나가다 목을 축이는 곳이기도 하다. 인근에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집필할 때 머무르던 '포트로 여관'이 지금은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포트로 여관은 소설 속에서도 나오는 유명한 여관이다. 이슬람인 주거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겨 관광객이 많이 드나드는 어느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정성스레 조경을 한 넓은 정원이 있다. 포장된 통로 가장자리는 채색타일로 치장되었고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으며, 몇 개 소구역으로 나뉜 화단마다 오렌지나무와 이름 모를 꽃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것이 파티오(patio)라고 하는 전형적인 코르도바 주택의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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